4.19 혁명의 결과와 영향 및 의의보경 | 2014.04.13 12:10 목록 크게댓글(1) | 댓글쓰기2차 마산의거로부터 보름이 지난 4월 26일, 11년간의 철권통치를 유지하던 이승만은 거리를 뛰쳐나온 시민들의 분노와 시위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대한민국 헌정 CƯỜNG 최초의 민주주의 시민혁명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4.19혁명으로 하야하게 된 이승만과 이를 이루어낸 시민들의 모습, 그리고 이후 구성된 새로운 정부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4.19혁명이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과 4.19혁명의 의의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1. 4.19혁명의 결과: '승리의 화요일' 부터 제2공화국의 등장까지4월 26일 화요일 오전 10시 경, 시위가 격화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이승만은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주선한 시민 학생대표 5인과의 면담을 진행한다. 이 면담에서 이승만은 시민대표들의 하야 요구를 받아들였고 오전 11시, 라디오를 통해 아래와 같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승만의 이와 같은 담화문 발표에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시민들은 기뻐했으며 청년들은 이승만의 무너진 동상을 길거리에서 끌고 다녔다. 이후 오후 2시, 국회 본회의에서는 2시간에 걸쳐 아래와 같은 시국수습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 이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2. 3,15 정부통령선거는 이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3. 과도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4. 개헌안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즉시 실시한다. 다음날인 4월 27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가 수리되고 당시 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아 '허정 과도정부' 가 출범했다. 11년 8개월간 이어지던 이승만과 자유당의 제1공화국이 막을 내린 것이다. 4월 28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자신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향했다. 한편, 양주로 피신해있던 이기붕과 그의 가족은 비밀리에 경무대로 돌아왔고 이내 일가족이 집단 자살하였다. 4월 29일에는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의 구속을 시작으로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들과 자유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체포가 시작되었다. 5월 29일 새벽, 허정은 주한 미국대사와 비밀리에 이승만 대통령의 망명을 도왔다. 결국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망명한다. 허정은 이승만이 떠난 이후에 국회에 이 사실을 알렸고 이에 국회에서는 항의가 쏟아졌다. 6월 12일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국무총리로는 내각 수반이었던 허정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8월 12일, 국회에서의 선거를 통해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자신과 같은 한민당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하였다. 하지만 민주당과 자유당의 반대로 낙마하였고 8월 18일, 2차로 지명한 민주당의 장면이 총리로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2. 4.19혁명의 영향 및 의의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이자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4.19혁명은 그 상징성만큼이나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각 분야의 혁명의 영향이 사회 수많은 제도, 사람들에게 미쳤기에 그 의의 또한 다양하다. 1) 4.19혁명의 영향(1) 학생운동의 활성화4.19혁명은 이후 학생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4.19혁명의 주체로서, 학생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며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혁명 이후 시민들을 안정시키고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수습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한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온 후 '학원의 자유' 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학원에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해 학생회 건설 등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학원에서 주체적 자리를 확립한 후, 학생들은 학원을 벗어나 사회로 눈을 돌려 농촌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추진하였으며 통일을 위한 사회운동에도 뛰어들었다. 4.19혁명의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 학생들의 주권의식과 민주의식을 일깨운 것이다. (2) 민주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변화4.19혁명은 간접민주정치의 결함을 시민의 힘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부패로 여실히 드러난 간접민주정치의 폐단은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이에 국민들은 거리로 나서 혁명을 일으켰고 이는 국민의 힘으로 정치권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간접민주정치가 부패하면 국민들에 의한 압력정치. 즉, 직접민주정치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민주정치에 대해 인식하고 각성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80년대까지 이어지는 민주화를 향한 기나긴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3) 새로운 가치관과 질서의 등장이승만과 자유당정권 부패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인 (人) 의 장막이었다. 이승만은 시위가 격화되는 상황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는 이승만 측근의 소수 정치적 권력자들만이 정치적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19혁명은 이러한 인의 장막을 해체하고 정치적인 의사소통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또한, 독재정권 하에서 강요되었던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타파했다. 자유당 정권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반발하여 일어난 4.19혁명을 통해 학생과 청년들의 새로운 가치관과 가치체계가 사회 전반에 걸쳐 수용되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4) 전근대적, 봉건적 경제질서의 타파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3.15부정선거만큼이나 혁명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당시의 경제적 문제다. 정부 수립 이후 진행된 농지개혁은 전근대적 지주-소작농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평가되지만 영세한 농민들의 불만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또한 제조업과 상업, 금융업 등의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제의 식민지수탈 조직과 유사한 방식의 경영방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외에도 자유당 정권 하에서 성행하던 정경유착과 특권층에게 제공되던 불로소득 등은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체제가 전근대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4.19혁명은 위와 같은 봉건적 독점체제를 흔들었고 불공정하던 전근대적 경제체제를 합리와 절검에 따른 자본주의로 변화시켰다. 또한 이러한 국민들의 경제적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제2공화국의 민주당과 진보, 혁신계열은 새로운 경제계획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2) 4.19혁명의 의의(1) 대한민국 국민들의 발전된 민주의식의 표현해방 이후 도입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투쟁과 경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해방과 동시에 우리에게 이식된 것일 뿐이었다. 당시의 국민들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모방, 도입하면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안일한 생각은 자유당 정권의 11년 8개월간의 장기독재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에 국민들은 각성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남의 제도를 모방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시민의 권리와 진정한 민주주의는 고통이 따르는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4.19혁명이며, 이는 4.19혁명이 대한민국 국민의 발전된 민주의식과 이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이 가져온 결과임을 보여준다.(2) 주권재민의 확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적 정부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공권력을 이용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독재정권이었다. 이러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횡포 항거하여 일어난 시민들의 혁명은 곧 '공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권의 승리' 를 의미했다. 이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확인한 것이며 국민을 탄압하고 억누르며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러한 4.19혁명의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실릴 만큼 우리사회가 지향해야할 최고의 가치로 남아있다.(3) 좌절된 '미완의 혁명'4.19혁명은 독재정치를 휘두르는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들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4.19혁명은 명확한 한계를 가진 '미완의 혁명' 이기도 했다.4.19혁명은 주도적인 기구나 세력 없이 학생들과 민중들로만 이루어진,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강한 혁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혁명이 끝난 후, 정권은 4.19혁명의 정신을 조직적으로 이어받은 세력이 아닌 야당인 민주당에게 넘어갔고 민주당은 혁명 이후 터져 나오는 시민들의 요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잦은 당내분열로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와 같은 새로운 정부의 소극성과 무능함으로 4.19혁명의 정신은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고 이어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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